J.R.R. 톨킨의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계의 장엄한 모험담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돔 카루코스키 감독의 2019년 작품 '톨킨'은 그 환상적인 세계의 창조자가 되기까지의 인간적인 여정을 조명합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전기 영화를 넘어서, 상실과 우정, 사랑이 어떻게 불멸의 문학 작품으로 승화되는지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줄거리
영화는 목가적인 영국 시골 사레홀 밀에서 뛰어노는 어린 로널드 톨킨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이곳의 구불구불한 녹색 언덕과 빽빽한 숲은 훗날 샤이어의 원형이 되는 마법 같은 풍경으로 그려집니다. 어머니 메이블은 로널드에게 여러 언어를 가르치며 언어학에 대한 흥미를 키워주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녀가 아들들을 위해 만들어낸 정교한 이야기들은 톨킨의 세계관 구축 능력의 씨앗이 됩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에 이어 열두 살에 맞닥뜨린 어머니의 죽음은 로널드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겨줍니다. 카톨릭 신부인 모건 신부가 후견인이 되면서 로널드의 뛰어난 언어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학문적 전망을 해칠 수 있는 요소들을 우려하는 복합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킹 에드워드 학교에 입학한 톨킨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예술과 문학에 헌신하는 네 명의 청년들이 결성한 비밀 사회 'T.C.B.S.'의 멤버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 제프리 바체 스미스, 예술가 로버트 퀼터 길슨, 음악가 크리스토퍼 와이즈만과 함께하는 지적 교류는 톨킨의 청춘을 빛나게 만듭니다.
같은 하숙집에 사는 고아 에디스 브랫과의 만남은 영화의 감정적 중심축을 이룹니다. 음악과 문학을 공유하며 깊어지는 두 사람의 사랑은 모건 신부의 개입으로 시련에 직면합니다. 로맨틱한 관계가 학업을 방해할 것을 우려한 신부는 톨킨이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두 사람의 만남을 금지합니다.
옥스퍼드 엑서터 칼리지에서 고전 언어와 문학을 공부하는 톨킨은 앵글로색슨어와 중세 영어 연구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학문적 작업과 창의적 충동이 결합되면서 독창적인 언어 창조 실험이 시작되고, 이는 후일 정교한 신화 체계의 기초가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평화로운 학문적 추구의 세계를 산산조각 냅니다. T.C.B.S. 멤버들은 영국군에 입대하게 되고, 톨킨은 소위로 임관하여 통신 장교로 복무합니다. 솜 전투의 참혹한 현실은 끊임없는 포격과 진흙탕, 죽음의 무작위성으로 그려집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인 제프리와 로버트의 무의미한 죽음은 톨킨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참호열에 걸린 톨킨은 열병 환상 속에서 전장이 초현실적 영역으로 변하는 체험을 합니다. 회복 후 영국으로 돌아온 톨킨은 스물한 살이 되어 에디스와 재회하고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영화는 이 모든 경험들이 어떻게 만나 판타지 세계 창조에 영감을 주는지를 보여주며, 마지막에 톨킨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써주고 들려주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흥행
톨킨은 상업적으로 크나큰 실패를 기록한 작품입니다. 2천만 달러의 제작 예산에 비해 전 세계 박스오피스 총 수익은 겨우 900만 달러에 그쳤습니다. 미국 내 수익 450만 달러, 해외 수익 440만 달러로, 마케팅 및 배급 비용까지 고려하면 실제 손실 규모는 더욱 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개봉 주말 전 세계 수익은 약 290만 달러로 박스오피스 9위를 차지하는 데 그쳤습니다. 톨킨이라는 거대한 브랜드 네임과 '반지의 제왕' 시리즈와의 연관성을 내세운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2019년 5월이라는 개봉 시기도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장악하고 있었고, '명탐정 피카츄'와 '존 윅: 챕터 3' 등 대중적 호소력이 강한 영화들과 경쟁해야 했습니다. 전기 드라마라는 장르적 특성상 액션과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관객층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튼 토마토에서 비평가 점수 51점, 관객 점수 71점을 기록하며 엇갈린 평가를 받았습니다. 전문가들은 관습적인 전기 영화 접근법을 비판했지만, 실제로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은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흥행 실패는 현대 영화 시장에서 중간 예산 드라마의 취약한 위치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관객들은 점점 더 저예산 독립 영화나 고예산 스펙터클 영화로 양극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톨킨과 같은 작품은 애매한 중간 지대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연출과 영상미
돔 카루코스키 감독은 톨킨의 내면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줍니다. 특히 어린 시절 사레홀의 목가적 풍경과 옥스퍼드의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은 톨킨의 상상력이 자라난 환경을 완벽하게 재현합니다. 전쟁 시퀀스에서는 사실적 묘사와 환상적 요소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트라우마가 창작에 미치는 영향을 시각화합니다.
카메라워크는 인물의 감정 상태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합니다. 평온한 학창시절에는 안정적인 프레이밍을 사용하다가 전쟁 장면에서는 불안정한 핸드헬드 촬영으로 전환하여 심리적 동요를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색채 팔레트 역시 주인공의 내적 여정을 반영하여 초기의 따뜻한 톤에서 점차 어두운 톤으로 변화하다가 마지막에 다시 희망적인 색감으로 돌아오는 구조를 보입니다.
연기력 분석
니콜라스 홀트는 톨킨 역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유명한 작가를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서 한 인간의 성장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특히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하는 장면에서의 절망감과 에디스와의 재회 장면에서의 복합적 감정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릴리 콜린스의 에디스는 단순한 연인 역할을 뛰어넘어 톨킨의 창작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뮤즈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소화합니다. 두 배우 간의 케미스트리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그려져 관객들의 몰입을 이끌어냅니다.
T.C.B.S. 멤버들을 연기한 배우들도 각자의 개성을 살려 우정의 깊이와 소중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특히 제프리 역의 안소니 보일은 시인의 감성과 전쟁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설득력 있게 표현합니다.
장르적 특성과 차별점
톨킨은 전형적인 전기 영화의 공식을 따르면서도 독특한 접근법을 보여줍니다. 작가의 생애를 단순히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는 대신, 창작의 원천이 되는 핵심적 경험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여 서사적 집중도를 높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추상적인 창작 과정을 구체적인 생활 경험과 연결시키는 방식입니다. 어머니의 언어 교육이 언어학자로서의 기반이 되고, 친구들과의 우정이 원정대의 모델이 되며, 전쟁의 참상이 어둠의 세력에 대한 상상력의 근원이 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다른 문학가 전기 영화들과 비교할 때, 톨킨은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영웅화하지 않고 인간적인 약점과 고뇌를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차별화됩니다.
상징적 요소와 숨겨진 디테일
영화 전반에 걸쳐 톨킨의 작품에 등장하는 상징들이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레홀의 풍차는 샤이어의 방앗간을, T.C.B.S.의 네 멤버는 호빗들의 원정대를 암시합니다. 특히 전쟁 중 톨킨이 보는 환상 장면에서 등장하는 그림자 같은 형상들은 나즈굴의 모티프가 됩니다.
언어에 대한 톨킨의 집착은 영화 곳곳에서 세밀하게 표현됩니다. 옥스퍼드에서 고대 언어를 연구하는 장면들은 단순한 학문적 관심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욕망의 발현으로 해석됩니다.
에디스와 톨킨의 관계에서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에디스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들은 톨킨 작품에서 음악과 노래가 갖는 마법적 힘을 예고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개인적 평가와 추천
톨킨은 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 창작자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한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톨킨의 팬이라면 그의 작품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문학이나 창작에 관심이 있는 관객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상업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갖는 가치는 분명합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스펙터클 대신 인간의 내면과 성장에 집중한 진정성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판타지적 요소나 모험을 기대하는 관객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깊이 있는 감상을 원하는 관객들에게 특히 추천합니다.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예술가의 성장 과정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작품입니다.
관련 작품 추천
톨킨을 감상한 후에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작품들도 함께 보시기를 권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창작 과정을 다룬 '셰익스피어 인 러브'나 C.S. 루이스와 톨킨의 우정을 그린 작품들을 찾아보시면 더욱 풍부한 감상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영화를 본 후 톨킨의 실제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면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특히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우정과 희생, 상실과 회복의 주제들이 어떻게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문학가의 전기 영화를 좋아한다면 '미드나이트 인 파리'나 '데드 포엣츠 소사이어티' 같은 작품들도 함께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들 영화는 문학과 삶의 관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여 톨킨과는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