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카 차스테인이 총을 든 순간, 할리우드의 액션 히어로인들에게 새로운 기준점이 제시되었습니다. 테이트 테일러 감독의 2020년 작품 에이바는 단순한 액션 스릴러를 넘어서, 트라우마와 가족,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팬데믹 시대의 혼란 속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극장가의 어려움을 디지털 플랫폼의 성공으로 전환시킨 독특한 행보를 보여줍니다.
줄거리
에이바 포크너(제시카 차스테인)는 알코올과 마약 중독을 극복한 전직 군인 출신의 전문 암살자입니다. 그녀의 멘토 듀크(존 말코비치)에 의해 냉혹하고 효율적인 킬러로 훈련받았지만, 표적을 처치하기 전 반드시 그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를 묻는 특이한 습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조직 내에서 그녀의 감정적 안정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프랑스에서 영국인 사업가 피터 해밀턴(이완 그루퍼드)을 성공적으로 제거한 에이바는 곧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한 장군 암살 임무에서 잘못된 정보로 인해 정체가 발각되고, 수많은 경호원들과 총격전을 벌이며 간신히 탈출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야심찬 요원 사이먼(콜린 패럴)은 에이바를 조직에서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위험에 처한 에이바는 8년 만에 고향 보스턴으로 돌아가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차가운 가족의 시선입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보비(지나 데이비스)의 원망, 그리고 더욱 충격적으로는 여동생 주디(제스 바이슬러)가 자신의 전 약혼자 마이클(커먼)과 연인이 되어 아이까지 임신한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듀크마저 사이먼에게 살해당하자, 에이바는 복수를 위해 최후의 결전을 벌입니다. 사이먼을 처치하지만 그의 딸 카밀을 살려두는 자비를 보이며, 복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하지만 영화는 카밀이 에이바를 따라가는 모습으로 끝나며 열린 결말을 제시합니다.
흥행
에이바는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개봉한 작품으로, 전통적인 흥행 지표로는 실패작이지만 새로운 배급 모델의 가능성을 보여준 의미 있는 사례입니다.
6월 2일 부다페스트 프리미어를 시작으로, 미국에서는 8월 27일 DirecTV Cinema를 통해 선공개된 후 9월 25일 극장과 VOD 동시 개봉이라는 파격적인 배급 전략을 택했습니다. 극장 폐쇄와 제한된 상영관 운영으로 인해 전 세계 박스오피스 수익은 329만 달러에 그쳤고, 미국 내 수익은 고작 49만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완전히 다른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개봉 첫 주말 Apple TV와 Google Play에서 가장 많이 대여된 영화 1위를 기록했으며, FandangoNow에서는 2위에 올랐습니다. 특히 12월 넷플릭스 독점 스트리밍 시작과 함께 주말 차트 1위를 차지하며, 팬데믹 시대의 새로운 영화 소비 패턴을 보여주었습니다.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관심은 상당했으며, 이는 스타 파워와 장르적 매력이 플랫폼을 통해서도 충분히 발휘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장르적 혁신과 연출의 묘미
테이트 테일러 감독은 전작 걸 온 더 트레인에서 보여준 심리적 긴장감 연출 기법을 액션 스릴러로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에이바가 표적에게 질문을 던지는 독특한 설정은 단순한 킬러 영화를 철학적 스릴러로 승격시키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이는 뤽 베송의 레옹이나 데이비드 핀처의 세븐처럼 액션과 심리극을 결합한 작품들의 계보를 잇는 시도로 평가됩니다.
액션 시퀀스에서는 실용적이면서도 잔혹한 미학을 추구합니다. 리야드 장면에서의 총격전은 존 윅 시리즈의 정교함보다는 본 시리즈의 현실적 폭력성에 가깝습니다. 카메라워크는 핸드헬드의 역동성과 고정 샷의 정적 긴장감을 적절히 조합하여, 에이바의 내적 갈등과 외적 액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합니다.
제시카 차스테인의 변신과 캐릭터 해석
제시카 차스테인은 이 작품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제로 다크 서티에서 보여준 냉철한 분석가 역할을 액션 히어로인으로 발전시키며, 물리적 강인함과 정서적 취약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특히 가족과의 재회 장면에서 보여주는 미묘한 감정 변화는 그녀의 연기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를 증명합니다.
존 말코비치의 듀크는 조용한 카리스마로 영화 전체의 정서적 무게중심을 담당합니다. 그의 절제된 연기는 에이바의 감정적 폭발과 대조를 이루며 작품의 리듬감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콜린 패럴의 사이먼 역시 단순한 악역을 넘어서, 조직의 냉혹한 논리를 대변하는 복합적 인물로 해석됩니다.
가족 드라마와 트라우마 서사
에이바의 진정한 힘은 액션이 아닌 가족 관계의 복잡성에서 나옵니다. 중독에서 회복한 과거, 아버지의 도박 빚으로 인한 가족 이탈, 그리고 8년 후의 귀향은 현대 미국 사회의 가족 해체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머니와의 병원 장면은 용서와 화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각자의 상처가 어떻게 서로를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전 약혼자와 여동생의 관계라는 설정은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가미하면서도, 에이바가 선택한 길이 초래한 실질적 결과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갈등을 넘어서, 개인의 선택이 가족 전체에 미치는 파급효과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상징과 은유의 활용
영화 곳곳에 숨겨진 상징적 요소들이 작품의 깊이를 더합니다. 에이바가 표적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으로 해석됩니다. 그녀가 사용하는 가명들과 변장술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의 은유로 작용하며, 마지막 장면에서 카밀이 따라오는 모습은 폭력의 대물림이라는 숙명적 테마를 암시합니다.
특히 심장마비로 위장한 암살 방식은 에이바 자신이 감정적으로 '심장이 멈춘' 상태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읽힙니다. 보스턴의 겨울 풍경 역시 그녀의 내적 황폐함과 가족 관계의 냉랭함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탁월한 선택입니다.
장르 내에서의 위치와 차별점
여성 액션 히어로 영화의 계보에서 에이바는 독특한 위치를 점합니다. 원더 우먼이나 캡틴 마블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판타지적 요소도, 킬 빌의 양식화된 폭력미학도 아닌, 현실적이면서도 내성적인 접근을 택했습니다. 오히려 아토믹 블론드나 레드 스패로우 같은 작품들과 유사한 결을 보이면서도, 가족 서사라는 독특한 요소를 가미해 차별화를 시도합니다.
액션 영화로서는 다소 느린 템포를 유지하지만, 이는 캐릭터의 심리적 변화에 집중하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스펙터클보다는 감정의 밀도를 높이려는 시도가 일부 관객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다가올 수 있으나, 장르의 관습을 깨려는 실험 정신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개인적 평가와 추천
에이바는 완벽한 작품은 아니지만, 제시카 차스테인의 매력과 가족 드라마의 진정성이 작품의 아쉬운 부분들을 상당 부분 보완합니다. 특히 액션보다는 인간 관계의 복잡성에 관심이 있는 관객들, 그리고 여성 주인공의 다층적 매력을 감상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합니다.
단순한 오락거리를 원하는 관객들보다는 심리적 갈등과 가족 서사에 공감할 수 있는 성인 관객층에게 더욱 어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시카 차스테인의 팬이라면 그녀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존 말코비치와 콜린 패럴의 연기 역시 충분한 감상 포인트를 제공합니다.
연관 작품과 후속 감상 팁
에이바를 감상한 후에는 테이트 테일러 감독의 전작 걸 온 더 트레인을 통해 그의 연출 스타일 변화를 확인해볼 것을 권합니다. 또한 제시카 차스테인의 액션 영화 도전작으로는 제로 다크 서티와 더 헌트스맨: 윈터스 워를 함께 감상하면 그녀의 연기 변화 과정을 더욱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사한 톤의 여성 액션 스릴러로는 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아토믹 블론드, 제니퍼 로렌스의 레드 스패로우를 추천하며, 가족과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로미스도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감상 후에는 팬데믹 시대의 영화 배급 변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는 것도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